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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수사례(지역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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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목블루베리 불루오션(농가사례)
    • 작목

      과수 블루베리

    • 지역

      충청남도 논산시

  • 내용

    충곡리 블루오션, 푸르게~푸르게~

    블루베리 푸른들농장 이기성대표, “한번 입에 들어갔다 하면, 손이 동날 때까정 멈추지 않아요”

    기사입력 

    2017/06/28 [13:13]

     

    놀뫼신문

     


    논산역에 현수막 하나 펄럭인다. 『순창 블루베리&고추장~강천산기차여행』 순창 하면 고추장인데, 블루베리에게 순위가 밀려 있다. 보라색의 마법을 즐기는 ‘블루베리체험’은 1인 500g 직접 따갖고오기이다. 순창 인근의 고창은 복분자 텃밭이다. 오줌발이 쎄어져 접시까지 뒤집는다는 허풍, 과시라도 하듯 복분자 영어 이름은 블랙베리(black berry).  한편 초크베리로도 불리우는 아로니아는, 안토시아닌 성분이 엄청 많다고 하여 확산일로이다. 재배면적에서도 블루베리를 앞지르고 있는 초크베리는 발음상 초코렛이 연상되고 맛도 그리 연상되지만, 초크 밸브할 때 그 choke이다.


     

    논산 하면 단연 1위 심볼인 딸기는 스토로 베리(straw berry)이다. 지금까지 열거한 것들은 입에서 스르르 녹는 ‘베리’들이다. “아버지가 천신만고 끝 아들에게 귀농을 허락하면서 권한 작물은 딸기였습니다. 주변에서 검증되어 있으니 그나마 무난할 거라는, 돌다리 두드리는 심정이었겠지요!” 그러는 아버지에게 아들이 들여온 것은 딸기묘가 아니라, 발음도 요상한 블루베리라는 묘목들이었다. 2006년, 그러니까 11년 전의 일이다.  우리 나라에 블루베리가 처음 소개된 때가 2003년 전후이니, 그 후의 일이다.

    블루오션인 블루베리에 꽂히다

    논산대전 국도가 부적면에 들어서면 외성삼거리가 나온다. 거기에서 백제군사박물관쪽으로 회전하면 충곡로이다. 충곡로는 충곡리와 감곡리를 갈라놓는 경계선이다. 푸른들 농장은 원래 감곡리 1800평 밭에서 시작했다. 이제는 충곡리땅 1600평으로 확장하였고, 선별장과 판매장도 그 충곡리땅으로 옮긴 상황이다.

    인연이란 묘한 것인지, 이 농장 초창기 당시 기자는 ‘블루베리’란 간판에 끌려서 이 농장에 들어가 본 적이 있었다. 어느 작물이고 간에 뭐가 잘 되거나 떴다 하면, 자기가 최초라 주장하는 사람들이 이쪽저쪽에서 나선다. 김천설, 정읍설도 있었다. 블루베리를 조금은 알고 있던 상황에서 호기심 반 기대 반에서 들르게 되었는데, 주인장은 불청객에게 시식도 권하고 헤어질 때는 묘목 2개까지 선물하였다. 아주 오래 전 기억이라 그 맛은 정확히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당시에 블루베리는 귀한 열매라는 느낌이었고, 묘목 한 주당 가격도 비쌌다.

     

    이기성 대표 역시 그 당시의 조우를 기억해내지는 못하였다. 그러나 블루베리와 맺은 인연의 첫 단추는 생생하게 기억해낸다. 사람이든 자연이든 어떤 것 하나와 연을 맺음은, 아주 쉬울 수도 있지만...... 정성에 정성을 기울여야 하는 경우도 있다. 이기성 대표와 블루베리는 후자의 경우이다.

    “귀농에 관련된 인터넷을 뒤지고 책도 사보고, 고민에 고민을 거듭했다. 일단 무얼 할까 나름대로 적어보고는 하나씩 세부 조사와 서적 등을 참고하며 농가방문을 통하여 내 성향에 맞는 걸 찾기로 했다. 어차피 나는 어떤 농작물고 간에 초보일 수밖에 없고, 수십 년간 해오던 기존 농가를 상대로 경쟁하기에는 아무래도 벅찰 것 같았다. 그렇다면 남들이 하지 않는 작물을 선택하는 블루오션이 차라리 낫겠다는 생각이 들어, 새로운 품종에 대한 자료 수집과 공부에 집중해 들어갔다.

    관련 자료를 수집하던 중 우연히 블루베리를 접했다. 어렴풋이 좋은 과일 정도로만 알고 있었는데 우리 나라에서도 재배 가능하다는 사실을 알고서 집중 조사를 하였다.  그 당시 우리 나라에는 블루베리에 대한 정보가 거의 없던 시절이라 인터넷을 통해 미국과 일본의 홈페이지를 드나들며 자료를 모았다. 일본 서적을 4권이나 구입하여 밤에는 하라가나 가다가나를 익히고 학교 때나 쓰던 옥편을 뒤지며 일본 서적을 읽고 정리를 해나갔다. 자료가 쌓여갈수록 선택의 확신도 커졌다. ‘바로 이거다’라고 확신이 서게 되자 설레임 반 두려움 반이었다.”

     

    무대포로 제주도에 날아가다

    이렇게 풀어지는 그의 스토리는 이론과 실제에서 이론, 즉 ‘시작이 반’이라는 절반 절름발이였다. 실패하지 않으려면 실제이고 현장이다. 자료 수집 과정에서 블루베리와 관련된 일본 사람까지 알게 되어 살아 있는 블루베리 상세 정보를 알게 된 것은 결정적인 인연이었다. 묘목상인 그 일본인을 집요하리만큼 쫓아다녔다. 고객이면서도 묘목상인 그의 농장에 가서 인부처럼 일도 거들었다. 나무 한번 팔면 그걸로 끝인 대부분의 상거래에서, 그 묘목상은 의지의 한국인 가장의 열성에 감복했는지, 성가셔서인지 모르겠지만 마침내 그 무거운 입을 떼었다. 당시 일본이 앞서갔다고 하지만, 실패하는 농가 또한 적지 않았던 열도였다. 그 실패 원인 하나하나를 구체적으로 찝어서 전수해 준 것이다.

     

    과감하게 구입한 2년생 묘목들은 2~3년을 기다려야 주인에게 열매를 선보인다. 그 어린 것들이 열매 맺을 때까지 마냥 기다릴 수가 없는 노릇이었다. 날 잡아서 그 일본인과 함께 청주에서 제주도행 비행기를 탄다. 제주 블루베리 재배농을 찾아가 얘기 듣고서 가득 사온 블루베리를 갖고서 제일 먼저 달려간 곳은, 아버지였다. 맛을 보신 부모님 입에서 나온 반응은 감탄 아닌, 탄식이었다. “아니, 이런 걸 누가 먹는다구....? 너 그 묘목상에게 속았구나, 속았어!” 첫선을 보였건만 끌끌 혀를 차는 부모님... 그러나 이 대표는 낙심하지 않고, 그 밤에 가족들이 기다리는 대전집으로 달려간다. “와~ 이렇게 맛있는 게 있었단 말야?” 귀농을 크게 반대하지 않았던 부인과 애들은 처음 보는 블루베리가 동날 때까지 손을 멈추지 않았다. “됐어, 이젠 됐어! 장사란 애들과 여자 상대인데....” 이런 해프닝 전후 이야기 이야기는 키맨으로서 땅 주인인 아버지와 갈등하던 처음으로 되돌아간다.

    “귀농하겠다는 선언은 부모님에게 청천벽락이었다. 대학까지 보내놓고 동네사람들에게 자랑하던 번듯 직장 다니던 자식이 시골 내려와 농사 짓겠다고 하니 어느 부모가 반기겠는가? 펄쩍펄쩍 뛰시는 부모님 설득하기란 거의 불가능했다. 몇날 며칠 부모님 설득 작업에 매달렸다. 자식 이기는 부모 없다고, 땅은 내주시겠다고 하셨으나 블루베리란 작물에는 한사코 반대하셨다. 그때까지만 해도 나 역시 두 눈으로 본 적도, 먹어서 맛본 적도 없었기에 부모님 반대는 무리가 아니었다. 부모님 모시고 농장견학을 위해 경기도, 충북, 경상도 등을 둘러보았더니 더욱더 펄펄 뛰셨다. 차라리 딸기 농사 지으라고 역정 내신다.

    하지만 내 머릿속엔 블루베리 이외 어떤 작물도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푹 빠져 있었다. 내가 알아본 결과, 블루베리는 미국 타임지가 10대 건강식품으로 선정해 놓았다. 미국과 유럽에선 최고의 과실로 평가되어 재배 면적이 확장 일로이다. 일본에서는 50여년 전부터 재배가 시작되어 고가에 팔리고 있기에 우리 나라도 곧 확산될 거라는 확신을 굽힐 수가 없었다. 농업기술센터에 찾아가 블루베리 재배를 상담하자, 우려와 반대였다. 실패할 확률이 높다고, 절대 하지 말라는 권고를 받으니 확신에 차 있던 내게 어느덧 불안이 엄습해 왔다. 그 당시 주변 사람들은 블루베리 자체를 몰랐기에 가족이며 친구며 직장 동료들 모두 반대 일색이었다.

    확신에 찾던 마음이 점차 불안해질 무렵, 용기와 희망을 되살려준 사람이 처음 만났던 일본인이었다. 물론 그는 묘목을 파는 묘목상이었지만, 미국과 일본 사례를 들면서 ‘앞으로 한국땅에서 충분히 성공할 수 있을 거’란 말에 희망과 확신을 유지할 수 있었다. 우여곡절 끝에 블루베리 묘목을 사들이고 200평 남짓 조그만 하우스 한 동을 짓고 하우스 속에서 하루 종일 묘목 돌보는 일에 매진했다.”

     

    블루청개구리 같은 나무, 블루베리 실험정신

    이러는 과정에서 좀더 큰 확신을 갖기 위하여 제주도행 비행기표를 샀던 것이다. 우여곡절 끝에 한국땅에서 블루베리 상품화에 대하여 확신은 갖게 되었지만, 문제는 이것들이 제대로 커주지 않는 현상이었다. “귀농 당시 가장 힘들었던 건 부모님과의 갈등도 그렇지만 동네 사람들의 시선이기도 했어요. 되도록이면 남의 눈에 띄지 않으려고 하우스 속에서 살다시피했습니다. 그렇게 죈종일 일했음에도 재배기술이 없었기에 묘목들은 계속 죽어나갔고, 그때마다 부모님 한숨 소리는 높아만 갔죠. 나의 불안감 역시 커져만 갔습니다. 허지만 여기서 멈출 수는 없었습니다. 몸이 파김치일 때도 주경야독, 밤에는 미국과 일본, 유럽 홈페이지 드나들며 이론적으로나마 재배 기술을 습득했습니다. 틈만 나면 선두 농가를 찾아가 일 도와주며 귀동냥 눈동냥으로 하나 둘씩 배워나갔지요.. 이러는 가운데 일본 묘목상이 결정적인 도움을 주었던 겁니다요~”

    이 대표의 설명에 의하면, 외래종인 블루베리는 동양의 관행과 일반 상식을 거부하는 품종이다. 나무니까 당연히 땅에 심어야 한다?? 그러나 이 나무는 일반 흙이 아닌 ‘피트모스’라는 전용흙이 생육 조건이다. 외래종이므로 거기에 맞은 토양이 그것뿐이다. 용비어천가에 나오는 ‘뿌리 깊은 나무’가 아니다. 길어봤자 30cm인 실뿌리들이다. 이러저런 조건 때문에 화분(포트) 재배가 최적합이라는 결론에 도달했다. 그가 화분 재배 방식으로 돌아선 결정적 이유는 따로 있다. 엘리트 품종의 엄선을 위해서이다. 현재 블루베리는 품종만 해도 400여 종이며, 맛이 조금씩 다르다. 조금씩이라고는 하지만, 가장 정직한 게 ‘혀’이기에 소비자들은 매니어급 아니더라도 이내 귀신처럼 식별해낸다. 다른 걸 사먹었다가는 되묻는단다, “아니, 지난 번에 팔던 그 블루베리는 왜 없어요?”

    그 비결은 오직 실험정신(實驗精神). 이 대표는 지금까지 400여 품종 중에서 140여 종을 심어 봤단다. 실험용은 과도기 아이템이므로 포트에 심을 수밖에 없다. 열매가 열리면 길가는 사람 아무나 붙잡고 시식 소감을 청하곤 한다. 그 결과 최종으로 탑파이브(5)가 선발되었고, 그 하이파이브가 까탈스러운 주부와 아이들 입맛을 점령해가고 있는 중이다.


     

    화분재배와 하우스재배 챔피언 자처

    “블루베리는 우리나라 토양에 잘 맞지 않는다. 특히 수확철에는 장마와 겹쳐 품질이 떨어지는 악조건이다. 장마를 피해야 하고, 새 피해도 많아 방조망 설치가 필수다. 블루베리 재배가 확산되면 경쟁이 심화될 사태를 대비하여 시차를 앞당기는 조시 수확도 염두에 두어야 한다. 조기 출하를 위해서는 하우스 재배만이 블루베리 재배의 성공을 기대할 수 있었다. 무엇보다 탁월한 품종의 선택이 관건이다. 이 모든 것을 동시 다발로 해결법을 찾아내지 못한다면 성공 확률이 높지 않았다.

    품종은 직접 확인이 중요하다는 생각에서 국내 품종을 거의 모두 수집했다. 우수 품종으로 정평이 있는데도 국내에 없을 땐 수입하여 시험재배로 들어갔다. 토양과 관계없이 재배 가능한 것이 포트, 즉 화분였기에  포트 재배로 나갔다. 선두 농장들도 ‘무슨 과일을 포트에 재배해서 수확하느냐?’며 반신반의해했다. 초창기 토양에다 직접 식주했던 농가들 실패가 늘어나자 포트 재배로 눈 돌리는 농가가 많아졌다. 이게 소문 나면서, 어느 덧 내 일을 할 수 없을 정도로 견학 오는 농가들이 많아졌다.

    미국이나 일본에서는 하우스 재배가 거의 없었던 까닭에 블루베리는 노지재배라는 인식이 깔려 있던 터라 나의 재배 방식은 웃음거리가 되었고 동시에 주목거리도 되었다. 전국적으로 블루베리 재배농가들이 확산되면서 실패 농가도 늘어났다. 이런 흐름에서 나의 재배 방식은 어느 새 전국 방방곡곡에 소문이 나 있었다. 타지역 농업기술센타 직원들이 찾아오거나 각 지역 작목반의 단체 견학, 개인 농가들의 견학 방문이 속속 늘어났다. 일에 지장을 초래할 정도로 많아지자 견학을 제한하고 싶었다. 부모님은 ‘네 일 제쳐두고 대체 뭐하는 거냐?’며 걱정 태산였지만, 나도 수많은 농가 견학한 덕을 본 처지가 아니던가... 할 수 있는 한 성실히 상담하고 설명하곤 했다.”

    잘 알지 못하고 경험도 미천했지만 가능성만 믿고 확신했기에 밀어부친 결과, 어느덧 이기성은 전국 강사가 돼 있었던 것이다. 이제는 내로라하는 전문가들도 많아졌다. 재배 농가도 급속 확산되어 이제 논산만 해도 부적에 3~4농가, 광석, 성동, 은진, 가야곡 등 총 20여 농가이다. 신안 상주 같은 곳은 작목반이 있지만, 논산은 아직이다. 아버지 표현마냥 ‘멧돼지’처럼 366일 쑤시고 다녀야 하는 통에 작목반 모임 제안이 들어오긴 하지만, 여전히 여유롭지 못한 상황이다.

    과감히 버릴 때 비로소 얻는다

    푸른들농장 면적은 해마다 늘어 작년에는 하우스 15개동까지 확장하여 보았다. 그러나 올해는 9동으로 줄였다. 혼자서 그 많은 면적을 관리해 봤지만, 가족들의 권유도 있고 하여, 마이너스 경영을 받아들이게 된 것이다. 분재 관리, 실험 등은 366일 분산하여서 어찌어찌 해보지만 수확기에 몰리는 병목현상에는 답이 없어서이기도 하다. 몇 번을 미루다가 겨우 시간을 맞추어서 기자가 찾아간 시점은 수확이 70% 정도 진척되어, 그나마 저녁이 있는  타이밍이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오정동과 노은동 공판장 새벽 경매 내기 위하여 자정을 넘기는 일이 다반사였다. 수확기는 비닐하우스 출하기인 한달 4~5월말, 노지출하는 6월초중순부터 한달간이다. 이 기간 내 사람 구하는 건 거의 기적이란다. 부모님 빼고 10여 명이 투입돼야 하는데, 대전 처형이 맹활약하여 4명, 현지 6명은 그나마 딸기 끝나고서야 겨우...

    ‘병목’이라 함은 최종 단계인 선별작업에서이다. 올해 가뭄으로 난리지만, 블루베리 농가에게는 천행인 모양이다. 10여 명이 달래들어서 따온 블루베리 형제들은 이제 최종 선발전을 앞두고 있다.  워낙 예민한 육과라서 대량 처리가 가능한 선별기는, 이제는 무용지물이다. 100% 주인장의 손작업을 거치기 때문이다. 일이 너무 밀리면 혼자 일하는 아들이 애처로운 엄마가 야간 작업에 합류한다. 그런데 아뿔싸! 버리기에는 아까운 약간 짓무른 게 섞여서 들어갈 때도 있다. “아, 상한 것도 아닌데, 이런 걸 갖고 왜 그래??” 서울로 보냈던 100kg에 약간 짓무른 블루베리가 몇 개 들어 있다고, 항의가 들어왔다. 200만원 상당하는 돈은, 트럭 하나 불러서 반품을 하니 마니 하는 통화 끝에 고스란히 포기하고 말았다. 이런 현상을 시골노인네들은 쉬 이해가 돼주지 않는다. <무게를 더 나가게 하는 플러스 철학> vs. <엄선함으로써 고품질로 인정받아 단가 상승하는 마이너스 철학> 이 둘은 영원한 평행선이다.

    어쨌거나 이 대표의 마디다스 손은 선별에 여념이 없다. 하루 걸려오는 20여 통 안팎의 주문 전화를 받는 대로 택배 송장은 수기로 직접 쓴다. 전산과를 나온 그에게 엑셀 전송 방법을 권하니, 껄껄 웃는다. “초창기에는 홈페이지, 블로그에 공 참 많이 들였죠. 한때 블루베리 하거나 사려는 사람들은 내 블로그가 블루베리의 포털(portal)격였던 적도 있었어요. 이제 엄청 팽창한 사이버 영토에서 톱파이브 두각을 나타내려면 중원 고수들의 치열한 각축전일텐데, 이제 나는 거기에서 빠져나와 맛품질 성장에 올인하고 있어요. 차라리 오프라인에서의 바이럴마케팅(입소문)이 투자 가치 최고라고 봐서입니다.”

    그렇다고 하여 직판 같은 것을 접은 것은 아니다. 부직포로 만든 아담사이즈의 푸짐한 포트는 화분의 이질감을 희석시켜 주기에 도시농업, 옥상공원용으로 딱이다. 푸른들 농장 수확품들은 대부분 공판장에서 완판되기에, 냉동이나 쨈, 효소, 와인 등의 가공은 하지 않는다. 다만 생과나 나무채로는 현장 판매도 한다. 아이들이 농장에 오면 곧장 달려가는 곳, 토끼장이다. 거기 상층부에서 더부살이하는 노오란 잉꼬들은 꼬마손님들에게 군무를 시작한다.



     

      소는 누가 키웠나?

    수확철이 지나도 농장주의 일은 줄지 않는다. 다만 일꾼 없이 무쏘의 뿔처럼 혼자서일 뿐이다. 이러다 보니 가족들은 365일 뒷전이다. 이제 수입도 안정 궤도에 진입했지만 아버지집에서 절반을 숙식하는, 여전히 두 집 살림의 전형이다. 8순이 넘으신 부모님은 아들 벌여나가는 일들이 아직도 마뜩찮다. 논 한 켠에 주차장 낸 것부터.... 뭐 하나라도 싱궈먹을 땅을 잠식했기에 아깝다. 선별장 옆에 아담한 응접카페 하나 꾸리자, ‘일 안하고 노작거리기만 할 거냐?’ 지청구하던 아버지는, 이제는 동네친구들 오라 하여 거기서 막걸리 한 잔이다. ‘토끼풀은 맨날 누가 뜯어다 줄 건데?’ 타박하던 분이 이제는 그 아까운 블루베리 파지들 챙겨다 멕인다. ‘저놈들이 블루베리 엄청 좋아라 해!’라면서....

    이런 시골 전원살이 맛에 가장 큰 수혜자가 되어야 할 손자들이 어느덧 훌쩍 커버렸다. 아들은 어느덧 쉬흔을 넘었고, 세 손자는 모두 20대 청년들이다. 할아버지는 징그러운 ‘농업’이 당대로 끝나기를 바랬다. 그런데 어느날 아들이 생일 중에 생일인 농사를 짓겠다고 찾아왔다.

    손자들이 중고등학교 다닐 때, 그러니까 지금부터 7년 전인 2010년 아들은 아버지에게 이런 얘기를 들려준다. “아버지! 막내가 이제 중학교 입학했잖아요. 막내아이에게 가정환경조사에 아빠 직업 뭐라고 썼는지 물어봤어요. ‘회사원’이라고 썼다네요. ‘농부라고 쓰자니 챙피했어?’ 옆에서 듣고 있던 둘째가 끼어들었어요. ‘아빠, 나는 아빠의 직업을 농업이라 썼더니 담임선생님이 불러서는 하는 말, 챙피해하지 말라고 하대요. 더 웃긴 건, 그걸 본 짝꿍이 학비지원신청하라 하더라구요. 급식비도 줄 거라면서 지원신청하라 했어요! 둘째 녀석도 막내처럼 작년까지는 ‘회사원’이라 썼는데, 그때는 아무 반응이 없다가 이번에는 그랬다네요~~ ”

    조금은 속상한 이야기를 이제는 임의롭게 들려주는 아들은, 초등학교 5학년 때 고향을 떠나 대전 유학을 하였다. 거기서 30여년, 학교도 졸업하고 장가도 들면서 어엿한 도시인으로 살았다. 그 아들 이기성은,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 가난함과 고됨이 농부의 삶이란 걸 익히 알았기에 어려서부터 ‘농사는 절대 짓지 않겠다!’고 수없이 다짐했더랜다. 세월이 흐르고 세상이 조금씩 바뀌더니, 농사라는 게 어려서 생각했던 것처럼 고되고 가난한 것만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몸만 건강하다면 정년 없이 일할 수 있고,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수입도 괜찮을 것 같고, 전원생활도 영위할 수 있는 게 귀농이라는 긍정적 생각이 들더란다.

    그런데 이기성 대표의 이런 발상은, 부모가 시골에 계시니 비빌 언덕이 있어서 비교적 현실화가 용이했던 귀농케이스이다. 농업의 특성상 농지가 큰 변수이기도 한데, 일상탈출과 반항이 가능하도록 나름 은수저가 돼 주었을 수도 있다. 이제는 대학생인 자녀들 차례이다. 청년실업이 대란인 이 시대에, 청년 귀농도 들먹이는 즈음, 혹시나 아들이 졸업후 어느 날 찾아와 “아빠, 나 여기서 일할 거야!”라고 한다면,  아마도 할아버지보다 더 펄쩍 뛸 것만 같다.

    - 이진영 기자